01 단주 유림 선생 일대기


1945년 12월 2일 조국광복을 맞아 해외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끝내고 김포 비행장에 내린 임시정부 요인 일행 가운데 ‘아나키스트’로 이름을 떨친 52세의 단주(旦洲) 유림(柳林)이 포함돼 있어 세인의 눈길을 끌었다.
유림은 일본 강점기에 국내외 아나키스트 운동가들의 대표격으로 임정에 참여, 국무위원을 맡았고 광복 뒤 독립노농당을 결성해 미국,소련 등 열강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던 격동의 해방정국 속에서 반외세와 자립자강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던 인물이다.

유림은 귀국 뒤 기자회견을 통해 일제 강점기 때의 한인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을 일본 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해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통해왔으나 ‘안(an)’은 ‘없다’의 뜻이고 ‘아르키(archi)’는 우두머리.강제권력.전제정치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서 ‘안아르키’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는 강제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를 배격하지, 자율정부를 배격하지 않는다.”

사실 제 1 인터내셔널(1864~1876년) 이래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적인 정치 활동, 특히 정당활동에 대해 일종의 거부반응을 보여온 게 통례였다. 그렇지만 식민지 시대와 분단시대라는 조건에서 민족의 당면 과제인 자주독립,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 임정에 참여하고 광복 뒤에는 독자 정당을 세워 자주민주통일운동에 헌신한 유림의 일대기는 아나키즘 뿐만 아니라 현대 민족운동사에도 중요한 대목으로 자리잡기에 충분하다.


3·1 운동 뒤 가산을 정리 만주로


유림(柳林)은 동학농민 혁명의 깃발이 드높았던 1894년 5월 경북 안동군 월곡면 계곡리에서 손꼽히는 대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유림은 일찍부터 시대의 어두운 먹구름을 피부로 느꼈던 듯 17살 때인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소식이 알려지자 손가락을 끊어 ‘충군애국’이란 혈서를 쓰고 국권 회복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그 뒤 이웃 안동, 대구지역에서 청년들을 모아 부흥회, 자강회 등의 비밀 결사 활동을 벌이던 유림(柳林)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안동지역의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뒤 무장항쟁을 하기위해 가산을 정리, 모친과 부인, 아들 원식(당시 4살) 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난다.

유림(柳林)은 남만주 랴오닝성 유하현에서 이상룡,이회영,김동삼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던 서로군정서에 한때 합류했다가 1920년 8월께 부터는 베이징으로 가 신채호,김창숙 등 독립운동의 선배들을 만나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기틀 마련의 하나로 월간지 <천고>의 발간 작업을 거든다.
뒷날 유림이 보여준 고집스러울 정도의 결벽성과 비타협적 기개도 이 무렵 선배들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림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은 1922년 중국 국립성도사범대학 사범부 문과에 입학해 4년간 이념적 토대를 닦으면서부터이다. 당시 중국 지식인 사회에는 베이징대 총장 채원배 등을 중심으로 아나키즘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유림은 광둥,상하이,난징 등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국민당 좌파와 진독수,진형명 등 진보적 인물들과 사귀면서 채원배로 부터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 방략에 관한 시사를 받는다. 또 이미 아나키즘에 기운 신채호의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을 마친 유림은 다시 만주로 건너가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신민부,참의부 등과 접촉하며 통합작업에 참가, 1929년 7월에는 신민부와 합작으로 동포의 사회적 조직과 정신무장을 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책임위원 김종진) 결성의 산파역을 맡기도 한다.
이 무렵 유림(柳林)은 국내 아나키즘운동과 연계를 맺고 있다가 일제에 의해 첫 번째 투옥을 당한다.
국내 ,만주,일본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아나키스트 대표들이 1929년 1월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비밀리에 결성한 것이 뒤늦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1931년 4월부터 검거 선풍이 불어 최갑룡,이홍근,조중복 등 8명이 잇따라 체포되고 만주부 책임자로 봉천에 돌아가 있던 유림(柳林)은 같은 해 10월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 받는다.

유림은 대전감옥으로 이송된다.
이곳은 당시 사상범이 많이 수용된 곳으로 엄격한 규율로 이름 높았다. 여기서 일제는 형리 등을 통해 온갖 방법을 동원, 유림(柳林)을 회유해 변절시키기 위한 집요한 공작을 펼친다.
마침 유림(柳林)의 외아들 원식이 결핵에 걸려 요양 중인 것을 안 형무소 쪽은 “유 선생, 아들이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소, 앞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서약만 하면 치료를 위해 당신을 가석방하도록 노력하겠소 ”라고 끈질기게 회유한다.
그러나 유림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 자식이 죽더라도 내가 출소하면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자식을 팔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유림선생 약전> 중 당시 대전감옥에 함께 수감됐던 아나키스트 권오돈의 회고)
바른 말을 하고 이곳에서 죽을지언정 거짓말을 하고 나갈 수는 없다는 유림의 지조에 형리들조차 감복했다고 전해진다.


일군 가담 외아들과 절연


유림(柳林)의 생애에 ‘타협’이 없었음은 외아들 원식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원식은 뒷날 5·16 쿠데타에 참여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낸 인물로 일제 때는 만주에서 일본군 고급 장교였다. 유림(柳林)은 일제 침략의 첨병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아들과 평생 부자의 인연을 끊고 “자식을 잘못 키웠다 ”며 부인도 물리친 채 평생을 홀몸으로 산다.

원산,함흥,대전 등지의 감옥을 떠돌며 5년간의 형을 마친 유림(柳林)은 출옥하자 곧 만주로 탈출해 1942년부터 중경 임시정부에 참여한다.
당시 49세의 유림(柳林)은 황하를 건너 1만리에 이르는 길을 걸어 중경에 도착, 같은 해 10월에 열린 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노동위원장에 선출된다.
또 조소앙,조완구,차이석,김상덕,박건웅 등과 함께 임시헌장(헌법)의 수정기초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한다.
유림(柳林)이 임정에 참여한 시기는 민족진영 우파 일색이던 임정이 민족진영 급진파와 좌익 계열까지 망라해 통일전선적 성격을 막 갖추던 무렵이다.
임정은 1944년 4월 제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유림(柳林)을 비롯해 김성숙,김원봉,성주식,김붕준 등 비교적 진보적인 인사 5명을 국무위원으로 맞아 들인다.

이로써 한국 독립당 일색이던 임정에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자 통일연맹,해방동맹과 유림(柳林) 중심의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참여로 민족의 각 혁명정당과 사회주의 각 당이 연합된 ‘전민족통일전선’의 꼴이 갖춰진 셈이다.


반패권·반외세 노선 견지


유림(柳林)이 1945년 12월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해 맞은 해방정국은 미,소 양대국의 냉전구도에 휩쓸려 국토가 양분되고 민족의 분열이 극에 이르고 있었다.


유림(柳林)은 같은 달 22일 식민지 시대에 활동하다 숨진 아나키스트들의 합동 추도회에 참석해 이런 해방정국의 소용돌이를 맹렬히 비판한다.

민족의 구심적 의지가 우선 외국군의 철수와 군정의 철폐로 모여야 하는데도 오히려 이들을 등에 업고 자기 세력 확대에만 몰두해 좌우 세력의 대립이 깊어만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국은 1946년에 접어들어 신탁통치 시비를 계기로 더욱 혼란에 빠져든다.

우익은 비상국민회의(2월1일)를 결성한 뒤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대표를 보냈고, 좌익은 별도의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2월 15일)을 결성, 이에 맞선다.

유림(柳林)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같은 해 2월 12~13일 부산에서 경남, 북 아나키스트 대회를 열고 양쪽을 모두 비자율적, 비통일적, 비민주적 집단이라고 비판한 뒤,

•일체의 외세의존 배격 •통일된 민족을 기반으로 할 것 •지방자치 확립 등의 원칙에 따라 과도정부가 수립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아나키스트들은 두달 뒤 경남 안의에서 전국대회를 열어 스스로의 정당을 조직, 더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펴나가기로 결의한다.

노동자·농민의 조직된 힘을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선 정당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5·10 선거 당선자 제명 처분


이들은 1946년 7월 7일 서울 필동 역경원에서 독립노농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유림, 집행위원에 이을규(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양일동(도쿄 동흥노동동맹),이시우(도쿄 흑우연맹),신재모(대구 진우연맹) 등을 선출한다. 독립노농당은 창당선언에서 “국가는 인민의 복리를 위해 존재하고 인민의 복리는 인민 자신만이 가장 잘 지켜나갈 수 있다”고 전제, “일제 때 가장 가혹한 착취를 당하면서도 이 땅을 지켜 온 노동자,농민,근로대중이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밝힌다.


귀국 이래 민족통일국가 건설의 방도로 반패권주의와 반외세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유림은 이어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한 한국문제 해결과 그에 이은 단독정부 수립 등에도 잇따라 반대해 미군정과 이승만 계열의 최대 정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떠오른다.

유림은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려 하자 “우리나라의 일을 밖에서 남들이 결정하는 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일”이라며 참여를 거부한다. 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지연시키고 국토분단을 만성화할 우려가 있으며 나아가 골육상쟁의 비극을 낳을 가능성이 짙다”며 반대한다.  이 가운데 ‘골육상쟁의 가능성’에 대한 지적은 2년 뒤 6·25 전쟁으로 현실화된다.


그런데 이어 치러진 5·10 선거에서는 독립노농당의 일부 간부들이 당명을 어기고 무소속 또는 다른 사회단체 이름으로 출마해 신현상(공주), 장홍염(무안), 정준(김포), 육홍균(선산), 최석홍(영주) 등이 당선된다. 또 하기락(79세) 씨 등 당시 독립노농당 관계자에 따르면 주요 간부는 아니지만 당적을 지닌 사람까지 포함할 경우 14~15명에 이르는 당선자를 배출해 원내 교섭단체 구성도 가능하게 됐다.

유림은 그러나 이들을 모두 제명처분한다. 김구 주석이 이끌던 한국 독립당 역시 단독선거 반대방침이었으나 자기 당 출신 당선자를 제명하지는 않았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조치는 독립노농당이 정당이라기 보다는 ‘혁명집단’에 가까웠음을 잘 드러내준다.

아무튼 선거에 불참한 데다 자당 계열 당선자마저 제명한 독립노동당은 이후 현격한 당세 약화를 겪게 된다. 현실정치의 논리를 외면한데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이다. 심지어 1950년의 5·30선거에서 뒤늦게 노선을 변경, 경북 안동에 출마하지만 유림 자신조차 낙선한다.


5·30 선거에 이어 6·25가 일어나자 ‘수도서울 사수’라는 이승만의 녹음테이프에 속아 많은 시민들과 함께 서울에 남았다가 뒤늦게 빠져 나온 유림은 이승만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해 당국의 주목을 받는다.

“서울을 공산당에 넘겨주고 자기만 살자고 빠져나와 시민들을 희생시킨 책임을 이대통령은 느끼고 있는가? 책임을 느낀다면 왜 한마디 사과가 없는가?”

전쟁중에 이렇게 이승만을 질타한 유림은 결국 ‘괘씸죄’에 걸려 3개월 가량 재판없는 옥살이를 겪기도 한다.


또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직후에 반 이승만 범국민운동을 함께 벌이자는 신익희의 제의를 거절한 것도 유림의 지나칠 정도의 결벽성과 비타협적 지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중경 임시정부 시절에 절친했던 신익희에 대해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협력해 국회 의장까지 오른 사실을 들면서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이나 할 사람”이라며 면박을 주어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유림은 당의 재건에 온힘을 쏟았다. 그러나 국민들 가슴 속에 뿌리깊이 심어진 진보사상에 대한 의구심 때문인지 당세 만회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1958년 5월의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시 대구을구에 출마한 유림은 ‘공산당 4촌’이라는 역선전에 휘말려 상대후보에 훨씬 못미치는 표를 얻었을 뿐이다.


국회의원 선거 연속 쓴 잔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나자 이 무렵까지도 당의 잔여조직을 이끌던 67세의 유림은 혁신계의 대동단결을 호소, 장건상, 정화암, 김창숙, 김학규 등과 더불어 혁신동지총연맹 구성작업에 앞장선다. 그러나 혁신계의 주류가 사회대중당으로 옮겨 간 가운데 1960년 7·29 선거에서 이 연맹의 공천으로 안동을구에 입후보한 유림은 또 다시 낙선의 쓴잔을 마신다.

당시 서울 제기동에서 가정부를 두고 혼자 살던 유림은 1961년 4월 1일 정오께 집 마당에 나무를 심다 심장마비로 파란많은 일생을 마감한다. 바로 그 시각에 가정부는 쌀을 마련하기 위해 전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식민지 시대에는 망명생활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고 광복된 조국에선 외세의 지배와 이승만 독재에 투쟁했던 유림의 임종에는 아무도 함께 하지 못했다.

4월 7일 수유리 묘소로 향하기 직전 시청 앞 광장에서 치러진 사회장에는 뒤늦게 3천여명의 조객이 뒤를 따랐다. 또 1962년 3·1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은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유림과 노선은 다소 달랐으나 임정 때 함께 활동한 적이 있는 전민련 신창균 공동의장은 “단주의 사상은 오늘날 자주·민주·통일운동에도 중대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면서 “근,현대 민족운동사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선 유림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현대사 인물, 유림(柳林) - <한겨레신문 1991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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