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관향(貫鄕)은 전주(全州)이고 호(號)는 단주(旦洲)이다. 1898년 5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북면 계곡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은사 이흠공(隱士 頤欽公)이다. 조선조 세종(朝鮮朝 世宗) 집현전 학사(集賢殿 學士) 도승지(都承旨) 의손(義孫)의 후예이며, 삼산공(三山公) 대사간(大司諫) 정원(正源)의 현손(玄孫)이다.
 어머니는 김녕김씨부인 김성옥(金寧金氏夫人 金性玉)이다. 단종충신(端宗忠臣) 충의공 문기(忠毅公 文起)의 후예이며, 증 통정대부 대응파(贈通政大夫 大凝派) 종손(宗孫) 성규(成圭)의 여식(女息)이다.


1910년
협동학교(協東學校) 수학 중 한  일합병이 되자,「忠君愛國(충군애국)」네 글자를 손가락을 끊어 혈서(血書)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의하였다. 고성이씨부인 이난이(固城李氏夫人 李蘭伊)와 혼인하였다.
1915년
정진탁(鄭振鐸) 등과 대구를 중심으로 각지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도모하던 중,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7년
김용하(金容河) 등과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뜻을 둔 청년들의 모집에 힘쓰다가,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8년
독립운동전선의 고양을 위하여 동지들과 대규모의 암살 파괴를 계획하였다.
1919년
3·1독립선언 선포에 사전부터 협력하였고 운동이 개시되자 이운형(李運衡) 등과 함께 가담했으며, 제령위반(制令違反)죄로 쫓기자 준비된 계획에 따라 군사력 확보를 위하여 만주로 탈출하였다. 이상용(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과 협의하여 서로군정서특파원(西路軍政暑特派員)으로 두 차례 비밀리에 입국하였다가, 봉천에서 일경에게 구금되었다.
1920년
북경에서 신채호(申采浩), 남형우(南亨祐) 등과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에 노력하였으며,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데 힘썼다.
1921년
북경에서 신채호(申采浩), 김창숙(金昌淑), 김정묵(金正墨), 남형우(南亨祐) 등과 순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해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김규식(金奎植), 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담하였다. 중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독립운동의 실상을 널리 알렸고, 상해에서 망명한 각국 혁명자들과 교류하며 혁명이론을 연마하였다. 사천성 성도에서는 작가 파금(巴金)에게 에스페란토어를 강의하였으며, 에스페란토어의 보급에 힘썼다.
1922년
상해에서 김두봉(金枓奉) 등과‘깁더조선말본’을 저술하여 한글운동에 앞장섰다. 중화민국 국립성도고등사범학교 영문부(中華民國 國立成都高等師範學校 英文部)에 입학하였다.
1925년
중화민국 국립성도대학 사범부 문과(中華民國 國立成都大學 師範部 文科)를 졸업하였다. 광동에서 김원봉(金元鳳) 등과 한인청년연맹(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 양성에 노력하였다. 상해에서 민중사(民衆社)를 조직해 독립정신과 자유사상을 널리 계몽하였다. 이때 대구에서 신재모(申宰模), 방한상(方漢相) 등이 진우연맹(眞友聯盟)을 결성하자, 방한상(方漢相)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고 폭탄 및 무기 반입을 추진하는 등 아나키즘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1926년
상해에서 홍진(洪震) 등과 독립운동 진영의 규합에 노력했으며, 봉천에서 중국 국민당원들과 한중혁명 세력의 연대를 꾀하였다. 광동, 상해, 남경, 무한 등지에서 중국 국민당 좌파의 아나키스트 원로들 및 진독수(陳獨秀), 진형명(陳炯明) 등 혁명가들과 교류 연대하였다. 광동기계공인총동맹(廣東機械工人總同盟)을 통해 십만 노동자를 조직 지도하고, 홍콩과 광주의 대규모 노동자 봉기인 광동의거에 참여하였다.
1927년
무한에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모색하다가 한구 영조계 회수투쟁에 참여하였다. 북경대학총장 채원배(蔡元培), 양계초(梁啓超), 임서(林序) 등 개혁사상가들과 조선의 독립 및 중국의 정세에 대한 방략을 토론하며 연대하였다. 이청천(李靑天) 등과 더불어 중국인 유격부대와 합작하여 독립군의 강화에 노력하다가, 봉천에서 일경에 구금되었다.
1928년
길림에서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韓族勞動黨 中央執行委員)으로 피선되었다. 김동삼(金東三) 등과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여 교육사무를 담당하였다. 길림에서 여준(呂準), 이탁(李卓) 등과 재만한인교육회(在滿韓人敎育會)를 조직해 교과서 편찬, 교원양성 사무를 담당하였다. 길림 오상현에서 한인의 권익을 위하여 중국 관헌과 항쟁하던 중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929년
김동삼(金東三), 김좌진(金佐鎭) 등과 재만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에 노력하였다. 북만주 해림에서 김좌진(金佐鎭)과 독립운동 방략에 관해 토론하며, 민족진영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를 막기 위해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무장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후 길림으로 되돌아와, 중국 관헌의 한인 압박에 항쟁하다가 영안현에서 중국 경찰에 구금되었다. 11월 10일과 11일 평양에서 개최될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 주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에 참석하기 위하여 평양으로 왔다. 수차례 회합 끝에 이홍근(李弘根), 최갑용(崔甲龍) 등과 11월 1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고 본부 및 만주부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동 연맹은 만주를 군사훈련장으로 결정하였다. 11월 7일 평양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30년
만주의 봉천에 독립운동 간부 양성을 위하여 의성숙(義誠塾)을 설립하였다. 국내에서 20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교육을 시켜, 중국의 여러 학교에 배치하다가 일경에 구금되었다. 이 무렵 아나키즘 노동운동을 재건하고 국내 연락을 위해 남상옥(南相沃)을 원산으로 파견하였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중국인들과 함께 한중인민항일군을 조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1937년
치안유지법 제1조 위반으로 서대문, 원산, 함흥 등의 감옥을 거쳐 대전에서 징역 5년을 만기 출옥한 다음, 만주로 탈출하였다. 가택 수색을 당한 뒤 구류 처분을 받은 시점부터 만기 출소까지 만 6년 이상 구금되었다.
1938년
남북만주를 순회하며 독립운동 세력의 재편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0년
북경, 천진 등지에 체류하면서 중국인들과 함께 한중항일연합군 조직을 도모하였다.
1941년
일본군이 천진의 각국 조계를 점령하자 천진을 탈출하였다.
1942년
국민정부 제3전구사령부에 체류하며 한국독립군 원조 문제를 토의했다.‘일개민족(一個民族) 일개정부(一個政府), 일개이념(一個理念) 일개집단(一個集團)’,‘당파 합동연이(黨派 合同聯異), 정부 공대균담(政府 共戴均擔)’의 사상을 전개하고,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를 중심으로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총결집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원(大韓民國 臨時政府 議政院議員)으로 피선되어, 환국할 때까지 가장 많은 의원입법안을 제안 통과시켰다.
1943년
대한민국 임시헌장 수개초안 작성위원(大韓民國 臨時憲章 修改草案 作成委員)으로 피선되었다.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종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大韓民國 臨時憲章)과 그 전문(前文, 머리말)을 입법 제안하여 통과시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委員)으로 피선되었으며, 관제수개 기초위원(官制修改 起草委員)으로 피선되어 새로 제정된 헌법에 의한 관제를 설정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건국강령 수개위원(大韓民國 建國綱領 修改委員)으로 피선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 건국강령 기초위원(大韓民國 建國綱領 起草委員)과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大韓民國 憲法 起草委員)으로 피선되었다. 8월 9일 일본의 항복을 예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해서 중국 중앙방송국을 통해 국내 동포들에게 질서유지, 연합국에 대한 편의 제공, 임시정부 환국 대비 등을 방송하였다. 일본의 항복 후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연립 5개 당파 중 3개 당파가 환국하기 전에 임시정부를 해산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위기 상황이 전개되자, 아나키즘 진영인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朝鮮無政府主義者總聯盟)의 대표로서, 3·1운동에 의해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강조하며 끝까지 옹호 유지하였다. 당면정책 기초위원(當面政策 起草委員)으로 피선되어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임시정부의 방책을 강구했고,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민족자주를 내세우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섰고, 비상국민회의 노농위원장(非常國民會議 勞農委員長)으로 피선되었다. 4월 21일부터 시작하여 23일에 끝난 경남 안의의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에서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한반도 아나키즘 진영의 역량을 총결집한 동 대회의 만장일치 결의에 의하여, 7월 7일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이 창당되었으며 당수(黨首)로 피선되었다. 노동자와 농민 등 일반 근로대중을 근간으로 하는 자주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당 이념 전파를 위해 독립노농당 기관지인 독립노농신문(獨立勞農新聞)을 창간하였다. 창당 6개월 만에 백만 명에 육박하는 당원을 확보함으로써 해방정국 최대 규모로 당세가 신장되었다. 민족자주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민주의원(民主議院),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입법의원(立法議院)을 반대하였다.
1947년
비상국민회의 부의장(非常國民會議 副議長)으로 피선됐고, 전국혁명자총연맹(全國革命者總聯盟)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장(中央執行委員長)으로 피선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하의 남북협상 안을 제시하며 남북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발표하였다. 김구(金九)의 한국독립당이 김성수(金性洙)의 한국민주당과 합당을 꾀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극우화시키려 전횡하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 견제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좌익 계열을 제외한 백여 개의 정당 사회단체와 연합하여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統一獨立運動者中央協議會)를 결성하고 대표간사(代表幹事)로 피선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大韓民國 臨時政府 議政院)을 확대 계승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국민의회 國民議會) 의장(議長)으로 피선되었다. 환국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확대 강화책으로 영입되었던 주석 이승만(李承晩), 국무위원 김성수(金性洙), 국무위원 이청천(李靑天) 등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제명하였다. 김일성(金日成) 주도의 평양회담이 미리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이고 자주적이지 못함을 들어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등의 남북협상을 반대하였다. 남북협상은 이 나라의 수도인 서울에서 개최함이 바른길이라며 서울에서의 회담을 역설 제안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 문제를 들어, 김구(金九)에게 평양의 남북협상에 나설 경우 임시정부 주석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임할 것을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자격으로서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한편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이에 따른 정부 수립은 필연적으로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올 것이므로, 제헌의회 참가를 거부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였다. 제헌의회 당선자 14명을 비롯하여, 당의 결의를 어기고 선거에 참가한 출마자 전원을 제명하였다. 이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이승만(李承晩) 정권 지지를 선언하며 참여한, 박열(朴烈)과 이을규(李乙奎) 등 당의 부위원장 2명도 아울러 제명하였다.
1949년
10월 1일 프랑스 파리의 세계아나키스트대회에 한반도를 대표하여 초청받았다. 이 대회를 통해서 세계아나키즘운동의 방향을 바꾸려고 준비했으나,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탄압으로 참가하지 못하였다.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와 시민 희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강도 높은 비판 성명을 발표하여 피난지 부산에서 3개월간 불법 구금되었다.
1952년
이승만(李承晩)의 영구 집권을 위한 대통령직선제 개헌 정치 파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韓國民主主義者總聯盟)을 조직하고 이승만(李承晩) 독재에 반대 항거하였다.
1953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휴전협정 반대에 나서자, 더 이상의 민족 살상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휴전협정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휴전협정을 촉구하였다.
1960년
4·19 민주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김창숙(金昌淑), 장건상(張建相), 조경한(趙擎韓), 정화암(鄭華岩), 김학규(金學奎), 권오돈(權五惇) 등과 조국의 완전한 자주통일독립을 쟁취하고자 7인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혁신동지총연맹(革新同志總聯盟)을 결성하고 유림(柳林), 장건상(張建相), 정재용(鄭在鎔), 박석홍(朴錫洪), 권오돈(權五惇), 최천택(崔天澤) 등 6인 집단지도체제의 지도위원(指導委員)으로 피선되었다. 7·29 총선 이후 분열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위해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사회대중당(社會大衆堂), 한국사회당(韓國社會黨), 혁신동지총연맹(革新同志總聯盟) 등 5당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1961년
민족의 시련은 미진하여 조국통일과 완전자주독립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모든 과제를 동지들에게 남긴 채, 4월 1일 정오 향년 63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이 거행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建國勳章 國民章)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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